2010년 04월 27일
상상력과 취향

누워서 침뱉기에 관한 잡담

이 글은 윗 글에 대한 트랙백인데... 본문에 대한 것은 아니고, 덧글에서 촉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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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취향

내가 발터 벤야민의 글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것은 「Erazähler」(Storyteller, 얘기꾼)이라는 글이다(민음사에서 나온 벤야민 선집에는 ‘얘기꾼과 소설가’라는 제목을 실려 있는데 굳이 제목에 소설가를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나는 민음사의 번역본으로 봤다). 벤야민은 니콜라이 레스코프라는 러시아 소설가를 위해서 썼다. 그는 레스코프가 훌륭한 이야기꾼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이야기와 이야기꾼에 대해서 다룬다.

벤야민에 의하면 이야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구전을 통해서 전해지는 경험이다. 이야기는 몸으로 부딪혀 얻어낸 삶의 재료로 짜여진 통찰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유효한 조언고 그것은 넌지시 건네주는 제안과도 같다. 이야기는 결말이 없이 열려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데?”라는 궁금증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이야기는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대기적인 서술처럼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보고서와 같다. 그러나 그 건조함이 이야기의 풍부함과 깊이를 보장해준다.

벤야민은 이야기와 소설, 정보 등과 대비하여 이야기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 근원적 통일성, 죽음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소설은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개인에 의해서 삶의 특정한 부분이 극단적으로 묘사된다고 말한다.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나오는 정보들은 소설보다 더 한 것들이다. 그것은 언제나 해설이나 설명과 함께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이런 것을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세계는 좁아졌고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희한하고 재미있는 일들을 매일처럼 접하지만 이것들은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정보가 되어 사라진다. 넌지시 건네지는 이야기와는 달리 이런 소설이나 정보는 강한 구속력을 가진 충고처럼 보인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설명을 붙이지 않고 얘기를 그대로 다시 전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얘기의 예술은 이미 반쯤이나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해설 없이 건조하게 그 자체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시시콜콜한 지시사항이 담긴 소설이나 신문의 정보에는 대부분 권위자의 해설과 설명이 따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 벤야민의 지적처럼 이야기의 권위가 근거하고 있는 죽음이 일상의 공간 바깥에 자리한 사회에서는 이야기는 살아남을 수 없다. 요즘에는 해설이 곁들여진 정보가 훨씬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설명이 부가된 정보는 쉽고 편리하다. 그러나 이야기에 그 풍부함과 깊이를 견줄 수는 없다. 이런 정보에 익숙해진 사람은 이야기의 풍부함과 깊이를 그리워하기는커녕, 자신이 확보한 해설이 가장 권위 있는 것인지(다른 말로하면 널리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흠잡을 데 없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에 떤다. 때문에 어떻게든 더 많은 다양한 정보를 모으려고 애쓰고, 그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정보를 자신의 입장으로 취한다. 듣는 사람이 상상력을 작동시켜야 하는 이야기와는 달리, 이런 정보의 취합과 선택에서는 상상력보다는 눈치가 작동되기 일쑤다. 더욱 안좋은 것은 다른 사람의 상상력까지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을 보면 정말 감탄스러운 것이 많다. 대부분의 좋은 그림책은 설명도 없고, 열려진 결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출판사는 여기에 부모님을 위한 해설을 따로 만들어 넣는다. 이 그림책이 어떻게 읽혀야 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친절하게 이야기한다. 부모가 해설에 따라서 아이에게 설명해주는 순간, 그림책이 가진 풍부한 상상력과 깊이는 단숨에 귄위를 앞세운 강제적인 정보가 되어 버린다.

그림책만이 아니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영화나 대부분의 예술작품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작품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기 전에 너무 많은 해설과 정보와 만나게 된다. 오히려 그런 해설이 없다면 불안해한다. 이렇게 많은 정보들 사이에선 상상력은 억눌리게 되고, 개인의 취향은 자라기 어렵다. 빈곤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취향은 사실상 ‘귄위에 의해서 강요된 취향’에 가깝다. 이렇게 강요된 취향이 가장 안좋은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면 삶을 전체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낳게 된다. 좋은 것, 편한 것, 아름다운 것, 유쾌한 것만 삶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진다. 에릭 윌슨이 「Against Happiness」에서 말한 것처럼 요즘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잘 짜인 행복 방정식에 맞춰 항상 방긋거리며 만족의 통념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는 것이다. 불쾌하고, 어둡고, 무겁고, 격식을 갖춰야 하는 것, 복잡한 것에는 눈을 돌리거나 배제하고 싶어한다.

상상력은 날개 달린 용이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희한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상 능력이 아니다. 상상력은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전혀 새로운 방법과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동물과 다르게 양 손을 해방시킨 인간에게 도구라는 것을 쥐어준 것도 바로 이 상상력이고 요즘 사람들마다 극찬하기 바쁜 아이폰을 만들어 낸 것도 상상력이다. 롱샹 성당을 만들어낸 것도 상상력이고, 치시탈리아 같은 죽이는 차를 만들어낸 것도 상상력이다. 그런 상상력이 지나치게 친절한 해설과 정보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다. 상상력은 점점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능력이 되어가고 있다. 벤야민의 표현처럼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졌던 것이 어느 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세상은 모든 취향은 존중받아야 한다. 예를 들면 소녀시대를 좋아하든지, 백현진을 좋아하든지,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설령 강요된 취향을 가졌다고 해도 그건 부끄러워하거나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다. 내 눈으로 봤지만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내 귀로 들었지만 내 귀로 들은 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월·E에서 등장한, 우주로 나간 지구인들처럼 움직이고 있지만 내 발로 걷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by souly | 2010/04/27 21:32 | 잡담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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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yjhahm at 2010/04/27 21:57
ㅎㅎㅎ 잘 읽었음!
Commented by longseason at 2010/04/27 23:50
아이고야!
Commented by Carrot at 2010/04/28 13:49
그러니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좀 떠들어보자는 이야기였는데 어쩌다가 언쟁까지 간 건지 좀 이해되지 않네요. 무슨 마가 끼었나......
Commented by longseason at 2010/04/28 21:47
좀 당황스러우셨겠지만, 그게... 그러니까 [Parental Advisory] 딱지 붙은 데서 많이 뒹굴면 좀 익숙해지실겁니다. ^^
Commented by Carrot at 2010/04/28 22:15
^^
Commented by 잇글링 at 2011/08/11 03:10
[잇글링] jellyfish님이 [상상력에 권력을]을(를) 아랫글로 연결하셨습니다. (보러가기 : http://www.itgling.com/spot/880543 )
Commented by longseason at 2011/08/11 10:21
잇글링은 좀 생소하지만 연결된 글은 잘 보았습니다. ^^ 그런데 그런식으로라면 무수한 상상력으로 분화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청각적 상상력, 공간적 상상력, 시간적 상상력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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