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1월 04일
2011년에 좋았던 음반들



Dishes with Oysters, Fruit, and Wine by Osias Beert the Elder (1620-1625)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정물화'의 원형인 17세기 홀란트(네덜란드) 회화다. 이와 같은 정물화는 17세기 유럽 미술시장-오늘날 미술계의 전신인-에서 매매되었다. 회화 구입은 자본주의가 싹튼 네덜란드의 중산층 사이에서 매우 성행했다. 그러나 이 정물화는 '바니타스(Vanitas,라틴어로 덧없음을 의미)'의 이미지로, 현대의 정물과는 매우 다르다. 포도주와 과일을 그린 이 회화는 인간사의 허영과 덧없음을 상징한다. 17세기 대중에게는 바니타스 회화의 상징과 메시지가 잘 이해되었다. 레몬은 관습적으로 겉과 속이 다름을 상징한다. 막 부풀어 올라 썩으려는 오렌지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은유다. 반짝이는 빛은 죽음의 덧없는 순간을 나타낸다. 이 바니타스 회화는 우리 현대인의 눈에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메시지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들은 현대의 미술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대의 미술과는 또 다른 구실을 했으며, 매우 구체적이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도덕적 메시지의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중에서 -


위 그림은 알렙님의 2011년 결산 포스트에서 보았다. 처음에 보자마자 한해를 마무리하며 소개하는 포스트와 너무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는 생각에 올리신 분의 센스에 감탄했다. (같은 그림 따라 올리는걸 용서해주시길... ) 위에 옮겨놓은 매리 앤 스타니제프스키의 글은 다른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저 그림을 설명하는데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굴의 디테일이었다(그림을 누르면 커진다). 과거 굴은 성적인 함의, 방탕과 타락을 은유했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인지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17세기와는 달리 지금은 굴에서 그런 종류의 흥분(?)이나 메시지를 캐치해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런 종류의 흥분이 아니라 싱싱한 굴이 던져주는 시간에 대한 은유였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먹지 않은채 뒤돌아버린다면 다음에는 만날 수 없는 시간, 그 싱싱함 말이다.


올해의 음반이라는 것도 이런 느낌이지 싶다. 지금 여기서 맛보지 않으면 다시는 느낄 수 없는 싱싱함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좋은 음반이라면 시간이 지나도 고전으로 남겠지만, 그건 저 굴과 같은 싱싱함은 잃어버린, 박제된 아름다움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리 요즘 음악이 탐탁찮더라도 신보에 소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나는 해가 바뀌는 것이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저 그림을 보다 보니 결산을 하고 싶어졌다. 순전히 그림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예전과 같은 열심은 무뎌져가지만 운좋게도 좋은 음반들은 여전히 만나고 있다. 여러 웹진들의 결산도 끝났으니 이제야 찾아 듣게될 음반들이 더 많겠지만 아무튼 2011년은 아래 음반들을 많이 들었다.   


 

Bon Iver와 Panda Bear에 대한 애정은 몇 차례 밝힌 바 있다. Wild Beasts는 The Walkmen처럼 앨범을 낼 때마다 점점 마음에 든다. 가사는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좀 은유의 과잉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좀 유치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운드가 그걸 상쇄하고도 남는다. Andy Stott은 누구에게나 추천할만한 음악은 아니지만 아마 우리 시대의 '바니타스 이미지'는 이런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음반이다. 이건 아직 음반도 구입하지 못했는데, 아마존에서 올해 나온 다른 음반과 합본된 것을 구하려고 한다. 도쌍세님의 리스트에서 3위에 올라 있어서 너무 너무 반가웠다.




장기하와 얼굴들과 하찌와 애리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했고, 얄개들의 앨범에 대해서는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아직까지 못써서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러나 올해 최고였다. 트램폴린의 앨범은 보컬은 내 취향이 아닌데, 사운드가 좋다. 1집에서는 차라리 스웨디시팝스러운 후반부의 트랙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2집의 사운드는 전혀 다른 인상으로 완성되어서 많이 놀랐다. 프로듀서 DJ 은천과 새로운 기타리스트의 공도 있을 것이고.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최근 등장한 뉴웨이브/신스팝 취향의 앨범 가운데 유일하게 마음에 든다.




예년에 비해서 2011년은 클래식 신보를 많이 듣진 못했다. 샤이의 베토벤 녹음도 아직 듣지 못했다. 뭐 이 바닥에서는 이제 재발매 염가 박스 세트가 메인으로 자리잡은 상황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이미 구입해 놓은 것들을 듣기에도 벅차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4종은 각별했다. 위 음반들은 공통적으로 음악의 역사성, 시간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음반들이다. 아이마르의 리스트 프로젝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내게 리스트를 들려주었다. 사실 저런 식으로 연주하면 리스트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기 보다는 본인의 비전을 앞세우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음에 든다. ECM에서 새롭게 녹음한 바흐의 소나타와 파르티타에서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기돈 크레머는 러시아 피아노 삼중주의 시작과 현재를 한데 묶은 앨범을 내놓았다. 2009년에 작곡된 빅토르 키신의 <거울>과 차이코프스키의 op.50이 그것이다. 원래 ECM은 이런 식으로 시대를 가로 지르는 프로그램 짜는 것을 즐기는 편이지만 이 음반은 <거울>이 바로 이 연주자 세 사람에게 헌정된 곡이라는 점에서 좀 각별하다. 르네 야콥스의 음반들을 통해서 친숙해진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바흐 서곡 모음집도 좋았다. 이미 객관적 구성을 포기하고 상상력과 개성의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날개를 단 것처럼 보이는 ‘역사에 기초한 연주관행’의 현재 좌표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귄터 라파엘의 교향곡집은 신보에 3CD짜리 박스세트임에도 불구하고 신나라 세일에서 7,000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가격에 건진 대박상품이다. 푸르트뱅글러가 초연했다는 1번은 빠져 있지만,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과 연주한 4번을 비롯해서 과거와 최근의 녹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은 전통적인 면모에서 혁신적으로 나아가는 모습까지 고루 느낄 수 있는 귄터 라파엘의 음악과도 어울린다. 3장의 음반 중에 아직 세 번째 음반 코랄심포니는 듣지 못했는데, 앞의 두 장만 가지고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작곡가를 만난 것도 기쁘다. 






올해의 노래를 생각해보자면 Balam Acab의 <Apart>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약관 20세 청년의 정규 데뷔 앨범에 실린 곡인데, 앨범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쏙 드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이 곡은 마음에 쏙 들었다. 15년 전에 Way Out West의 <The Gift>를 들으면서 느꼈던 기분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이젠 <The Gift>를 들으면서는 다신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할거다. 



올해는 ‘인디의 대약진’이라는 수사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좀 다르다. 이제 음악을 듣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 음악을 평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음악을 ‘경험’해온 세대가 아니라 음악을 ‘소비’해온 세대가 부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칵스, 이디오테입, 구남, 몽구스의 앨범을 들으며, 그리고 백비트의 90년대 베스트 앨범 리스트를 보면서 그랬다. 음악의 경험이 항상 외부에서 이루어졌던 세대, 그러니까 장식화된 음악을 소비해온 세대가 부상하고 있는게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음악이 무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타인의 흔적’을 가지지 않은 음악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음악의 ‘역사성’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음악을 소비해온 세대는 음악의 역사성을 질문하기 보다는 음악을 장르적인 특징으로 환원하는데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이 둘은 언뜻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음악을 습관적으로 장르적인 특징으로 환원시키다 보면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다르다. 얄개들 리뷰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데 일단은 이정도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해의 하이프로 이디오테입을 꼽고 싶다. 물론 모두가 좋다라고 말 할 때, 나는 아니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런거는 절대 아니다. 그냥 시간이 많이 늦어서 그런다.




by longseason | 2012/01/04 03:32 | 음악 | 트랙백 | 덧글(20)
2011년 12월 17일
이것저것 on DG


정명훈의 과도한 보수에 대한 논란은 삭감안을 받아들인 재계약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된 것처럼 보인다. 한겨레가 창간되던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소액 주주로 참여했던지라, 지금까지 봐오고 있지만 종종 이번처럼 어이없는 컬럼이나 기사를 보게되면 좀 짠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클래식계 변방에 놓인 서울시향에서 아무리 총알을 장전해놓고 기다려도 세계 정상급의 지휘자를 모시기는 쉽지 않다. 대우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화려하게 이어나가고 싶은 지휘자라면 서울에 오기로 마음먹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꼭 지휘자를 해외에서 찾아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국내 지휘자 중에 뚜렷한 대안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정명훈도 그의 지명도에 비해서 바스티유를 사임한 이후, 특별히 주목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주요 오케스트라들의 하마평에 오른 적은 있어도, 그를 모셔가려고 경쟁이 벌어지거나 오케스트라들의 러브콜이 쇄도한 일은 없었다. 이건 그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음악적 성격과 위상이 애매하다는 의미이다. 그와 동갑인 리카르도 샤이의 화려한 행보는 물론이고 요즘 떠오르는 젊은 지휘자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에게도 안정적인 포스트가 절실했던 것이 사실 아닐까. 서울시향과의 궁합은 여러모로 양측의 필요에 의해서 맞아떨어진 감이 있다. 문제가 되었던 서울시향 수준에서 과도한 보수는 정명훈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서울과 인천의 정명훈을 모시기 위한 경쟁과 당시의 결정권자에 의해서 알아서 올라간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정명훈이 부임한 이래 많은 변화가 있었고, 서울시향이 발전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올해는 가지 못했지만 2010년 서울시향의 공연을 세 번 보았는데, 내가 느끼기에 서울시향은 어린이처럼 스폰지처럼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을 흡수하는 오케스트라처럼 보였다.



문제는 정명훈의 보수가 아니다. 정명훈이 삼류인가 일류인가를 따지는 어이없고 유치한 질문은 더더욱 아니다. 정명훈에 의한 서울시향이 지금 어떻게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질문하는 것이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서울시향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저 연주력이 좋아졌고, 유럽투어도 하고, 유명 연주자들이 협연자로 나서고, DG에서 음반 나오고, 그 음반이 좋은 평가를 받으니 잘 되고 있다, 이제 5년, 10년이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다. 뭐 사실 이런걸 내가 고민해야할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수준도 되지 않지만 내가 생각엔 주위에서 이런 것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서울시향의 말러 음반을 들으면서 어떤 가능성과 회의를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지에 실린 사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홀에 늘어선 오케스트라의 사진을 보면서는 실망스러웠다. 이 음반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 실황인데, 왜 유럽 투어 중에 섰던 콘서트헤보우 홀의 사진이 실렸을까? 생각해보면 어떤 맥락인지 알겠는데, 그런 맥락이 G20을 유치하면 '국격'이 높아질거라는 생각과 닿아있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그러니까 그 사진 한 장만 보았을 뿐인데 우리에게 지금 왜 일급의 오케스트라가 필요한가, 혹은 서울시향이 어떤 오케스트라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들에 쉽고 편한 대답을 들은 느낌이다. 여기에 2악장을 들으면서, 도무지 춤곡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우아함도 리듬감도 결여된 랜들러를 들으면서, 아아 이런 것들은 전통없이는 아무리 열심히 연습한다고 얻어지는게 아닐거야, 과연 그 대답처럼 서울시향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아마 안될지도 몰라, 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3악장으로 넘어갔는데 이번엔 아니야 뭔가 될지도 몰라, 이런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3악장은 들어본 일이 없다. 물론 좋은 의미다. 어떻게 들으면 이건 정명훈이 지휘한 3악장이라기 보다는 단원들이 가진 트로트의 전통(뽕 필?)이 반영된 것을 지휘자가 승인한 것 같기도 하고.

정명훈은 좋은 지휘자이고, 그의 지도 아래 서울시향이 발전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혼자의 힘으로 좋은 결과를 낳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DG에서 음반 나오고, 유럽 투어했다고 이제 서울시향의 수준도 많이 올라갔어요 라는 식의 하나마나한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울시향의 미래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줄 사람들이 곁에 있기를 바란다. 과연 서울시향은 어떤 오케스트라가 되려고 하는가? 각자의 색을 지닌 수많은 오케스트라 가운데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오케스트라를 롤모델로 삼을 것인가? 유럽이나 미국 유수의 오케스트라들과 같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란 무엇인지? 가능한 일인 건지?  뭐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런 분들 많이 있을거라고 본다. 지금의 이런 것들도 그런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얻어진 부산물일테지,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이쯤에서.

P.S 1
덧붙이자면 진짜 낭비는 정명훈이 국내에서 그저 관현악 지휘자로 썩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의 본령은 오페라에 있었다. 지휘자든 악단이든 오페라로 단련되면 진짜 실력을 논할 수 있게 될텐데. 그러나 어쩌랴. 변변한 극장 하나 제대로 없는걸.

P.S 2
요즘 음반사들 돈없다. DG도 마찬가지다. 잘나가는 오케스트라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레이블을 차리고 음반을 발매해서 실속을 차린다. DG에서 음반 나온 것에 큰 의미 둘 필요없다고 본다. 서울시에서 녹음 비용을 댄 것도 문제가 된 모양인데 요즘 메이저 레이블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스튜디오 녹음은 거의 하지 않는다. 공연 실황의 녹음이 주류이고, 기업의 협찬을 받아 녹음을 진행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음반사 돈으로 녹음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서울시에서 녹음 비용을 치뤘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크게 흠이 되지 않는다.




엘렌 그뤼모의 첫 모짜르트 협주곡이다. 이 곡 사실은 아바도와 녹음했는데 23번의 카덴차를 두고 그뤼모는 부조니의 것을, 아바도는 모짜르트의 것을 서로 고집하는 바람에 녹음은 사장되고, 아바도는 루체른에서 연주하기로 했던 약속도 거두고, 협연자를 교체했다고 한다. 잘나가는 그뤼모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마음에 맞는 악단과 동곡을 다시 녹음했다. 개인적으로 뭘해도 좋은 아티스트가 둘이 있는데 엘렌 그뤼모와 힐러리 한이다. 우치다 미쯔코의 모짜르트같은 비엔나의 우아함은 없지만 향기가 폴폴 올라오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연주다. 부조니의 카덴차는 호로비츠 정도가 연주했다고 하는데, 모짜르트적인 느낌은 아니고 20세기의 느낌. 그래도 모짜르트 음악에서 아니면 어디서 그런 시도가 가능하고 이만큼이나 어울리겠는가. 모짜르트는 위대하다. 19번과 23번 중간에 <Idomeneo>의 한 대목을 편곡해서 넣은 프로그램도 흥미롭다. 그뤼모답다.  




1분30초짜리 카덴차를 놓고 그뤼모와 결별(?)을 선언한 아바도는 요즘 모짜르트 교향곡과 협주곡 녹음을 진행 중이다. 물론 모두 실황연주이다. 위암 수술 이후, 아바도는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를 거쳐 이제는 오케스트라 모짜르트에 전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의 젊은 연주자들을 직접 선택해서 볼로냐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엘 시스테마에서 자극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오케스트라 모짜르트와의 실황 녹음들은 모두 훌륭하다. 유일한 흠이 있다면 커버 디자인이었는데, 이 음반은 그래도 낫다. 모짜르트의 호른 협주곡은 잘 녹음되지 않는데, 일단 카라얀과 데니스 브레인이라는 커다란 벽이 있기 때문일까? 찾아보니 호른 협주곡은 모짜르트의 친구나 다름없는 허물없는 연주자를 위해서 작곡되었고, 필사본도 다른 것들과는 달리 지저분하고 "달려라, 당나귀!"같은 재미있는 말들이 많이 적혀져 있다고 한다. 음악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음반을 들어보면 데니스 브레인과 카라얀은 너무 거장적인 태도로 심각하게 이 곡을 연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경쾌하고 가벼운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2번은 너무 사랑스러운 협주곡이 되었다. 위에서 카덴차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아바도가 그런 것에 고루한 사람은 아니라는걸 알 수 있는 것이, 이 연주에는 호른주자인 알레시오가 만든 아주 짧은 카덴차가 삽입되어 있다. 악보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데니스 브레인의 녹음에는 아예 카덴차가 없으니, 모짜르트가 만들어 놓은 카덴차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아바도가 부조니의 카덴차를 반대했던 이유는 고루한 노인네의 고집이 아니라, 순전히 음악적인 이유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휘자로서 아무리 독주자의 영역이라지만 그 카덴차가 전체와 얼마나 조화로운지를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호른 협주곡 음반은 어려운 곡은 아니지만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이 말한 모짜르트의 '순수한 칸타빌레'를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선율들로 가득하다. 



쓰다 보니 모두 DG에서 나온 음반이다. 연말이 되니 여기저기서 결산이 쏟아진다. 최민우 평론가도, 피치포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웹진도 결산을 끝낸 모양이다. 이제 이런저런 결산 리스트들을 보면서 음악을 들어보고 내가 놓친 음악들을 찾아 만나는 즐거움만 남았다. 아마존 UK에서도 내년 초까지 시원하게 음반 가격 내려주기를 바란다. ㅎㅎㅎ






by longseason | 2011/12/17 17:24 | 음악 | 트랙백 | 덧글(13)
2011년 12월 16일
Achtung Baby (20주년) - 시간은 쏜살 같지만 어떤 것은 제자리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내게 90년대는 여전히 손 닿을 거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게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란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1991년은 음악팬들에게 특별한 해로 회자되곤 하는데 아마 여러 음반 가운데서도 유투와 너바나의 앨범이 발표된 해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음반 모두 올해 2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패키지가 등장했다. 

너바나의 20주년 음반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이미 몇 년 전에 리마스터링이 한 번 된데다가, 리마스터링이 필요한 음악이라고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투의 음반은 다르다. 나는 내게 1990년대를 열어준 음반으로 항상 세 음반을 떠올린다. 디페시 모드의「Violator」,  프라이멀 스크림의「Screamelica」, 그리고 이 유투의 이 음반「Achtung Baby」이다. 디페시 모드는 1992년이 되어서야, 프라이멀 스크림은 1993년에서야 들었는데, 유투의 이 음반은 미국에 다녀온 사촌 덕분에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별 것 아닌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누구에게나 이 음반은 정말 '깜놀'에 '충격'으로 가득한 음반이었다. 그때 나는 그다지 진지한 리스너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을 통해서 뭔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지난 앨범들의 성공을 바탕으로 세계를 돌면서 유투는 공연만 한 것이 아니라 음악의 새로운 흐름과 경향을 단숨에 흡수하여 자신들의 음악에 접목시켰다. 유투는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베를린의 한자 스튜디오로 날아갔고 브라이언 이노, 다니엘 라노어, 스티브 릴리화이트, 플러드라는 드림팀을 꾸려서 이 음반을 완성했다. 문제는 이거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사실을 한 번 더 생각했더라면 나는 「Achtung Baby」 20주년 앨범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엣지가 리마스터링을 감독했다는 것에도 혹하여 흔들리는 일은 없었을 거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사촌이 사온 미국반을 내치고 유럽반을 다시 구입해서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미국반과는 달리 유럽반은 온전한 부클릿-성기노출된 한 컷의 사진-과 고급스러운 프린트의 픽처 디스크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리마스터링은, 하다 못해서 게인이라도 살짝 올려서 어떻게든 차이를 만들어놓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투의 이 음반은 차이가 없네... 스피커로 들어서 차이가 희미하더라도 MDR-900같은 헤드폰으로 들으면 차이가 드러나기 마련인데, MDR-900으로 들어도 없네... 헤드폰으로 들어서 꽤 큰 볼륨을 주었을 때야 기타 사운드의 윤곽이 조금 두드러지는 정도의 아주 적은 차이가 느껴지는데, <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과 <until the END of the World>에서나 좀 나타날뿐, 곡에 따라서는 거의 차이가 없는 트랙도 있다. 실상 이 정도의 차이라면 감상에 들어가면 거의 무시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굳이 이 음반은 구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음반은 뭔가 아쉽거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이미 손댈것 없는 수준에 올라있던 것이다. 리마스터링 작업을 감독하기 위해서 스튜디오에 들어서면서 엣지는 무슨 생각했었는지 궁금하다. 리마스터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설상가상으로 이 음반은 얼마전 발매된 이전 앨범들의 디럭스 패키지와는 달리 고사양, 고퀄러티의 하드케이스 책자형 패키지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누군가 이 음반을 구입한다고 한다면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릴 것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20년을 지나갔지만 이전 모습 그대로도 여전히 빛나는 음반이다.

이 앨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나는 것인데 얼마전 네이버에서 성문영씨가 이 앨범을 언급하면서 추천곡으로 <ONE>을 선곡했다. 물론 대중적인 면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ONE>은 훌륭한 곡이고 우리나라에서 특히 인기 있는 곡이고 그들이 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처럼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불려지면 그럴듯하게 들리겠지만, 이 음반에서 가장 먼저 추천될만한 곡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이 음반의 거의 모든 것을 좋아하지만 감상할때마다 덜그럭거리는 것이 <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과 <until the END of the World>의 사이에 <ONE>이 끼어있는 배열이다. 개인적으로 <ONE>은 스킵하는 경우도 많고 재생빈도도 제일 적다.


나는 이 앨범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고, 즐겨들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이 앨범이 너무나 훌륭한 사운드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음악을 두고 장르 혼용으로 거둘 수 있는 성공의 최대치라는 식으로 추앙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매료된 것은 이 음악을 들을때마다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는 어떤 분위기이다. 아마 그것은 동시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동시대성에 대한 가장 멋진 비유는 아감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팽창하는 우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성운은 그 빛이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우리가 하늘을 어둠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바로 이 빛이다. 전속력으로 우리를 향해 오지만 그래도 빛을 내는 성운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멀어지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는 그 빛 말이다. 현재의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 애쓰지만 그럴 수 없는 이 빛을 지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이 앨범은 이처럼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는 빛을 끌어당겨서는 기어코 밤하늘을 밝혀버린 느낌이다. 그러니까 '동시대성'을 기어코 '유행'으로 만들어버린 기묘한 작품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 상황이다. 야콥 부르트하르트의 말처럼 위대한 작품은 천재의 특별한 능력과 예술의 발전 단계의 적절한 시기가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대륙에서 일렉트로니카와 힙합이 끓어오르고, 0과1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가 탐험되고 구소련이 해체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보위와 이노, 이기 팝, 로버트 플립의 전통을 끌어안고 기이한 울림을 선사하는 커다란 홀을 가진 한자 스튜디오 2가 있었고, 디페시 모드 등과 함께 새로운 음악을 실험하던 젊은 플러드가 운좋게 한 곳에 서로의 기운을 품고 모인 것이다(여기에 안톤 코바인까지 껴주고 싶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음악, 이런 사운드를 단순히 일렉트로니카와 록의 만남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음악에 가득한 앰비언스나 래리 뮬렌 주니어의 그런 드러밍 사운드가 장르 혼용으로 얻어진 결과일 뿐인가, 이런 톤의 사운드를 또 어느 앨범에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운드는 그저 유투의 사운드이고 유투의 음악인데 내가 보기에는「POP」앨범까지 이어졌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을 가진 유투는 딱 거기까지이다(나는 심지어 최근 두 장의 앨범은 아예 들어보지도 않았다).


사실 요즘 이 음반을 많이 들었던 것은 얄개들 때문이다. 얄개들 앨범을 듣고 있노라니 이 앨범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때로는 주문과도 같고 때로는 시처럼 들리기도 하는 엣지의 기타처럼 얄개들의 기타도 좀 그런 느낌이 있지만 얄개들의 레퍼런스는 유투만이 아니다. 다만 얄개들의 앨범에서도 나를 향하면서도 멀어지는 빛, 그 암흑의 빛을 향한 시선이 느껴진다. 유투의 그것이 '조금 이른' 형태의 동시대성이었다면, 얄개들의 앨범은 '너무 늦은' 종류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록음악에서 변방에 놓인 우리들에게 좀처럼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너무 늦은' 종류의 동시대성도 결코 가벼이 다룰 것은 아니다. 아무튼 결산하는 마음으로 얄개들의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고 있다. 사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했는데 유투 얘기만으로도 벌써... 늦어버렸네.




by longseason | 2011/12/16 00:34 | 음악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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